조지 프리데릭 헨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 출생: 1685년 2월 23일, 독일 작센 안할트 주 할레(Halle, Saxony-Anhalt, Germany)
- 사망: 1759년 4월 14일, 영국 런던(London, United Kingdom)
- 국적: 독일 출신 → 후에 영국으로 귀화 (1727년)
- 직업: 작곡가, 오르간·하프시코드 연주자
- 시대: 바로크(Baroque) 시대
헨델이라고 하면 연말 자선음악회의 <메시아>가 연상되지요.
이때엔 종교와 상관없는 사람들도 '할렐루야' 라고 소리치기도 하지요.
누구나 알고 있는 <메시아>의 영향이 큰데 그만큼 그의 음악들은 파격적이랍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일화의 <수상 음악> 등과 같은 많은 음악들...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해 직접 말을 걸려고 하는 닷한 외향적인 기질이 그의 음악 특징이라고 볼 수 있지요. 헨델은 항상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대중을 의식하며 대중을 위해 음악을 써낸 작곡가였어요. 작곡가로서 헨델의 성장은 그 시대 대중의 발걸음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지요. 1784년 이해 헨델의 음악이 공연되는 날이면 언제나 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음악은 영국의 시골마을까지도 파고들며 예술에 전혀 이해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열광시켰다고 하네요. 그 정도로 대중의 마음알 사로잡은 작곡가라고 할 수 있지요.
1685년 같은 해에 세 사람의 음악가가 태어났는데, 헨델-바흐-스카를라티입니다.
현 시대 우리에게 알려진 대다수의 작곡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헨델 또한 신동으로 시작했으나 바흐, 스카를라티와 달리 집안에 유명한 음악가는 한 사람도 없었지요. 따라서 헨델의 출현은 돌연변이라고나 할까요?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인 헨델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귀여운 아들에게 자기와 같은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는 외과의사가 겸업인 작센 공의 단골 이발사였던 탓인지 가위와 면도와는 인연이 먼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헨델은 7세 때 오르간 연주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하니 그 전부터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요. 악기로부터는 멀리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밤중에 지붕 밑에 있는 다락방에 몰래 들어가 달빛을 받으며 클라비코드로 독학을 했다고 해요.
헨델은 아버지가 63세, 후처인 어머니가 34세 때 태어난 아이였는데 훗날 고집이 센 아버지를 설득해서 헨델에게 음악을 시킨 것은 바로 작센 공이었다고 합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이후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고 10대때엔 이미 그곳 일류음악인으로서 활약했어요. 그 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한때 할레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했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함부르크는 바로크 독일 오페라의 중심지였는데 거기에서 최초의 오페라<알미라>를 상연하여 성공을 거둡니다.
21세 때 독일을 떠나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여행한 그는 법왕청의 방침으로 오페라 상연이 금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회음악으로 관심을 옮기기도 했습니다. 1710년에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하기에 이르고 그후 헨델의 음악 활동은 런던이 중심이 되었고, 앤 여왕에 이어 조지 1세와 2세를 섬기며 오페라, 오라토리오 중심의 화려한 활동을 하며 수많은 명작들을 남기게 되지요.
1741년에는 명작 오라토리오<메시아>를 작곡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를 순수하고도 감도 깊게 전해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빛을 발하게 됩니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했지만 기악 방면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유명한 것은 관현악 모음곡 <수상 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등이지요.
그는 런던에 매료되어 1726년 영국에 귀화했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매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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